2010년 2월 4일 목요일

arXiv.org

 

현재 최소한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이트는 arXiv.org (아카이브) 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이트는 디자인도 별로인 그냥 보면 아무 특징이 없는 사이트처럼 보이지만 물리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루에 한번 접속하는 사이트입니다. 이곳에는 60만 건 가까운 프리프린트가 올라와 있고 완전 개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연구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논문을 많이 그리고 빨리 읽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논문이 완성되면 저널에 제출되기 전 또는 그와 동시에 이 사이트로 프리프린트를 공개합니다. 이곳에 프리프린트를 올리는 이유는 먼저 자신의 일을 남에게 알리는 효과가 있고 또 다른 연구자로부터 잘못된 부분이나 빠뜨린 부분에 대한 코멘트를 얻을 수 있고 또 이 연구에 대한 originality를 인정받기 위함입니다. 아카이브는 미국의 로스 알라모스 국립연구소에서 xxx.lanl.gov라는 주소로 시작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사업은 코넬대학교 도서관에서 이어 받아 지금까지 서비스해 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트래픽 분산을 위해 세계 곳곳에 미러 사이트가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있었는데 지금은 중단되었습니다. 현재 200여 국가에서 한달에 40만명이 넘는 사용자가 접속해서 250만건의 논문을 다운로드 하고 있습니다. (물론 회비가 없는 무료 이용입니다.) 이 서비스를 유지하기위해서는 유지비가 꽤 나오는데 코넬대학교에서 이에 대한 공동 분담을 제안했습니다. 현재 연구기관을 통한 이용 중에서 약 75%가 상위 200개 연구기관에서 이용하는 거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연구를 많이 하는 기관에서 많은 이용을 하겠죠. 코넬에서는 이들 기관에 도움을 청했고 25개 기관이 도움을 약속했다고 합니다. 여기 그 리스트가 있습니다.

 

  • 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
  •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 University of Cambridge (UK)
  • CERN - European Organization for Nuclear Research (Switzerland)
  • CNRS - 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 (France)
  • Columbia University
  • DESY - Deutsches Elektronen-Synchrotron (Germany)
  • Durham University (UK)
  • ETH Zurich - Eidgenössische Technische Hochschule Zürich (Switzerland)
  • Fermilab
  • Harvard University
  •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 Imperial College London (UK)
  • 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
  •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 Max Planck Society (Germany)
  • University of Michigan
  • University of Oxford (UK)
  • University of Pennsylvania
  • Princeton University
  • SLAC National Accelerator Laboratory
  • Texas A&M University

 

모두 미국과 유럽에 소재한 대학과 연구소 뿐이네요.


<Mac OS X 에서 사용하는 가젯>

2010년 1월 27일 수요일

빙하게이트

요즘 히말라야의 빙하에 대한 예측을 둘러싼 논란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미 빙하게이트(glaciergate)라는 새로운 말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지구 온난화를 주장하는 학자들에게 큰 타격이 되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프레시안에 아주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지구온난화 이론, '과학적 사기극'으로 전락하나 (1/24)

2035년 히말라야빙하 소멸', 어떻게 유엔 공식입장이 됐나 (1/24)

지구온난화의 '종말론적 예측' 비하인드 스토리 (1/25)

빙하게이트, 연구자금 타내기 위한 조작이 동기 (1/26)

 

기후학이나 지구물리를 공부해보지 않은 입장으로 전문적인 내용에 대해 뭐라 말하기는 그렇지만 사건의 진행과정이 심상치 않군요. 특히 이 사건의 당사자인 유엔의 기후변화위원회(IPCC)가 히말라야 빙하에 대한 보고서로 2007년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한 것을 생각하면 이 사건의 파장이 만만치 않을 걸로 보입니다. 사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논란은 전부터 있어왔고 특히 이산화탄소에 대해서는 반대파의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반대자중에는 하버드를 비롯한 명문대학의 교수들도 있는데 그 논지는 그동안 소외되고 지원받지 못한 기후쪽 연구자들은 온난화에 대해 반대 의견을 가지더라도 말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지원과 많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이 이 분야에 뛰어 들고 있는데 이를 마다할 수 는 없다는 게 인터뷰의 주 내용이었는데... 제 생각에는 어느 쪽이 옳은 지는 판단하기가 아직은 이른 것 같습니다. 양 쪽 주장 모두 정당성과 단점을 가지고 있고 또 논쟁과 연구를 통해 진리에 다가가는 게 과학이니까요. 위의 기사중 1/24 일자 피어스의 기사는 과학자라면 곰곰히 생각해야 할 명제를 던져 준다고 봅니다. 아래는 기사중에서 인용한 피어스의 글입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오보를 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스나인이 나에게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말한 권위자였고, 나는 그저 받아쓴 사람이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기자들보다 더 엄격한 기준에 맞춰 일한다는 내 믿음은 상실됐다. 예전에 쓴 문제의 글은 음식을 담는 봉투로 쓰여야할 것이다.

 

사실 과학자들은 다른 누구보다 더 엄격한 기준에 맞춰 일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언론을 통해 자기와 자기의 연구가 널리 알려지고 유명인이되고 연봉이 올라가고 연구비가 비약적으로 늘어나는 기회가 온다는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는 않겠죠. 하지만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전 사회가 입게 될 피해를 한번쯤 생각했다면 어땠을까요. 책임을 면하기 위해 여러 변명을 늘어 놓고 있는 IPCC의 고위 과학자들 보다 자신의 기사가 잘못됨을 인정하고 쓰레기로 처리하는 피어스 기자의 모습이 더 아름답게 보이고 과학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네요.

 

<IPCC 회장인 파차우리 박사; 출처: http://www.telegraph.co.uk 기사는 여기>



2010년 1월 22일 금요일

표절 연구도 학문이 되었나

 

이제는 논문 표절에 대한 연구, 어떻게 표절을 들키지 않게 잘 할수 있을까가 아니라 표절을 포함한 연구 부정행위에 대한 연구가 학문의 한 영역이 되어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표절, 좀 더 정확하게는 과학 연구에서의 부정행위는 말 그대로 과학 연구 결과를 수행하고 발표함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과학 연구의 발전은 상호 믿음에 기초합니다. 즉 다른 사람의 논문이 그 사람의 능력 범위 안에서 타당하고 정확한 방법으로 수행된 연구의 결과라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이미 발표된 논문은 후속 연구의 출발점이 되고 또 다른 논문에서 논증을 위해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기존의 결론을 믿을 수 없고 관심있는 분야의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모든걸 다 다시해야하니 시간과 정열이 낭비되죠. 따라서 과학 논문에서 부정행위는 이런 불신을 키우고 후속연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거나 파행으로 이끌게 되므로 이는 반드시 하지 말아야할 일입니다. 이를 모두 잘 알고 있으면서도 부정행위는 끊이지 않고 일어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을 지 모릅니다.

연구에서의 부정행위는 표절이나 조작뿐 아니라 부정 부패까지 포함합니다. 약자에 속하는 다른 신진 연구자나 대학원 학생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까지도 포함됩니다.

최근 새로운 온라인 저널을 보았는데 표절에 대한 논문집입니다. 제목은  Plagiary: A New Scholarly Journal 입니다. 홈페이지는 http://www.plagiary.org/index.htm 입니다. 2006년과 2007년 출판물은 무료로 볼 수 있는데 그 이후로는 유료로 바뀐 것 같습니다. 그곳에 있는 논문이나 자료를 보면 열 받기 쉽습니다. 한번쯤 졸릴 때 들어가서 잠을 깨우기에는 좋을 듯 합니다.





2010년 1월 17일 일요일

ANPhA 아시아 핵물리 연합회

아시아 핵물리 연합회(ANPhA, Asia Nuclear Physics Association)가 2009년 7월 18일 창설되었고 2010년 1월 18일과 19일 일본 도카이의 J-PARC에서 첫 번째 심포지엄을 엽니다. (심포지엄 홈페이지는 여기) ANphA의 홈페이지는 일본 J-PARC에서 운영하며 여기 있습니다. (아직 썰렁합니다.) 2008년 10월 연합회 결성을 위한 첫 모임이 있었고 2009년 1월과 7월에 서울과 북경에서 설립을 위한 모임이 있었네요. ANphA는 한국-중국-일본이 주가 되어 아시아 핵물리 학자사이의 교류를 늘리고 후원하며 연구와 교육에 함께 공동으로 노력하는 게 목적입니다. 현재 회원국은 한,중,일과 베트남입니다. 심포지엄에는 이 4개국 외에 대만, 호주, 인도에서 참여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NSAC나 유럽연합의 NuPECC처럼 활동하면 좋겠지요. 현재 회장은 일본의 사카이 교수입니다. 아래 사진은 북경에서 찍은 사진으로 설립 멤버들입니다. 혹시 아시는 얼굴이 있는지 찾아 보시죠.

 

 

 

 

 


2010년 1월 14일 목요일

이란 핵물리학자 암살 소식

 

새해들어 여러 암울한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이란에서 핵물리학자가 폭탄 테러에의해 암살되었다는 소식이 나왔습니다. 이란 당국은 서방 측의 소행이라고 비난하고 미국은 이를 부인하고 있는 가운데 Masoud Ali Mohammadi 라는 이 학자가 이란의 야당 지지자라는 발표도 있었는데요, 일단 이를 이란의 핵 개발 계획과 연관시키는 것은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 이유는 모함마디가 핵물리학자가 아니라 (최근에는) 중력을 연구하는 이론 물리 학자로 물리학의 응용과는 거리가 아주 멀기 때문입니다. 테헤란 대학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그의 논문 리스트를 보면 (여기) 주로 중력, 양-밀즈 모델등에 대한 일을 해 왔습니다. 물론 그가 핵 개발에 개입한다면 약간(아주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가 암살 당할 정도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왔다고는 믿기 힘들군요.


<출처: NY Times>




2010년 1월 9일 토요일

CERN의 가속기 역사 50년

 

 

지금 세계 가속기중 최고 에너지 기록을 갖고 있는 LHC(Large Hadron Collider)는 유럽 연합의 CERN에 있습니다. CERN은 European Organization for Nuclear Research를 의미하는 데 세계 최대의 입자 물리 연구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CERN은 프랑스어인 Conseil Européen pour la Recherche Nucléaire의 약자입니다. 입자물리 연구소인데 이름에는 왜 Nuclear가 들어있을까요? 이는 설립 당시의 상황에서 유래합니다. CERN이 설립된 해는 1954년으로 유럽의 12개국이 1952년 합의한 안건에서 출발합니다. 연이은 핵발전소 사고로 인해 "핵"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사업이나 연구는 지원받기가 힘들어진 현재와는 달리 1950년대에는 핵폭탄과 핵발전소로 인해 "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지원받기가 쉬웠습니다. 이것이 입자물리 연구소인 CERN에 Nuclear라는 단어가 들어가게 된 이유입니다. 그리고 1959년 PS(Proton Synchrotron)가 완공되어 CERN의 첫 번째 가속기 실험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LHC가 가동된 해인 2009년은 CERN 가속기 실험이 5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심포지엄인

 

From the Proton Synchroton to the Large Hadron Collider - 50 Years of Nobel Memories in High-Energy Physics

 

가 2009년 12월 3일과 4일 CERN에서 열렸습니다. 여기에 가면 발표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CERN은 현재 20개국이 회원으로 있으며 6개 나라와 2개 국제 기구가 옵저버 자격 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 외 수십 개 나라가 비회원국으로 CERN의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나라 중 가장 늦은 2006년부터 비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곧 옵저버로 올라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CERN의 20개 회원국중 가장 많이 예산에 기여하는 나라는 독일입니다. 약 20% 가까운 예산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프랑스, 영국, 이태리가 따르고 있습니다. 2009년 회원국들로 부터 모은 예산은 약 7억 3천만 유로 (약 1조 4천억원 정도?) 입니다. CERN 회원국의 변화는 이렇습니다.

 

설립당시 회원국: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서독, 그리스, 이태리, 네델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스위스, 영국, 유고슬라비아 (총 12 개 국가)

1959년: 오스트리아 가입 (총 13 개국)

1961년: 유고슬라비아 탈퇴 (총 12 개국)

1961년: 스페인 합류 (총 13 개국)

1969년: 스페인 탈퇴 (총 12 개국)

1983년: 스페인 재합류 (총 13 개국)

1985년: 포르투갈 합류 (총 14 개국)

1991년: 핀란드, 폴란드 합류 (총 16 개국)

1992년: 헝가리 합류 (총 17 개국)

1993년: 체코, 슬로바키아 합류 (총 19 개국)

1999년: 불가리아 합류 (총 20 개국)

 

옵저버 국가: 터키 (1961년 부터), 이스라엘 (1991년 부터), 러시아 (1993년 부터), 일본 (1995년 부터), 미국 (1997년 부터), 인도 (2002년 부터)

옵저버 기구: 유네스코 (1954년 부터), EC (European Commision, 1985년 부터)

 

비회원국중 회원국이 될 가능성이 있는 나라: 루마니아, 세르비아

비회원국중 옵저버가 될 가능성이 있는 나라: 파키스탄, 한국

 

마지막으로 40년 전에 나왔던 노래를 소개합니다. 가사를 알고 싶거나 자세한 내용이 필요하시면 (예: 왜 코끼리 그림이 나올까 등)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이 노래는 우리나라에도 소개 되었습니다.

 




2010년 1월 6일 수요일

DESY 50살이 되다

 

독일에서 가장 큰 가속기 연구소라고 말할 수 있는 DESY(Deutsches Elektronen-Synchrotron)가 2009년 12월 18일 50번째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DESY는 막스-플랑크 연구소 집단과 함께 독일 연구소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는 헬름홀츠 연구회(Helmholtz Association)에 속해있는 연구소로 1959년 설립되어 최첨단의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DESY가 가지고 있는 가속기는 독일 최대이며 그 동안 핵/입자 물리 분야의 연구를 수행했고 지금은 새로운 분야의 연구에 쓰이고 있습니다. (DESY의 홈페이지는 여기)

 

DESY는 독일 함부르크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설립 당시의 목표는 장래의 입자 물리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세계적 가속기 센터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1964년 첫 번째 싱크로트론 가속기가 완성되고 여기에서 DESY라는 이름도 생겼습니다. 이 가속기는 당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가속기였습니다. 그 후 스토리지 링들이 만들어 지는 데 1974년 DORIS, 1978년 PETRA, 1990년 HERA가 완공됩니다. 90년대 후반과 200년대 초 ZEUS Collaboration에 의해 많은 데이터가 나왔습니다. HERMES Collaboration도 많은 논문을 생산 했었습니다. DESY의 첫 번째 목표였던 입자 물리 실험은 많은 업적을 남기고 지금은 종료되었습니다. 현재는 가속기를 이용한 다른 연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처음 DESY를 만들 때부터 싱트로트론 복사의 사용은 염두에 두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포항 가속기가 이 목적으로 건설 되었습니다. 차이점은 포항 가속기는 처음 부터 싱트로트론 복사 사용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입자 물리 또는 핵물리 실험은 초기부터 배제 되었습니다.) DESY의 싱크로트론 복사는 나노 스케일의 연구를 위해 사용됩니다. 재료과학, 바이오 과학등이 주 목표입니다. (PETRA III와 DORIS, free-electron 레이저인 FLASH 그리고 EU의 지원으로 건설될 XFEL이 주 실험 장치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 사실 이런 형태의 가속기는 이런 방식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유럽뿐 아니라 미국의 싱크로트론 가속기도 입자/핵물리 실험을 모두 마친 후에는 용도 변경을 하여 재료과학, 바이오 과학 쪽으로 다시 사용됩니다. 핵/입자 물리 쪽에서는 아쉽지만 DESY의 새로운 그리고 화려한 미래를 기대합니다.

 

 

<공중에서 바라본 DESY>




2010년 1월 5일 화요일

2010년 세계 몇 나라의 과학 예산

 

새해에 들어서면서 세계 각국의 과학 분야 예산이 발표 되는군요. 저번에 일본에서 진행되었던 과학 예산의 사무라이식 삭감에 대한 이야기를 올렸는데 (여기) 일본의 예산이 확정된 모양입니다. 아직 다른 곳의 소식은 보지 못했고 작년 12월 25일 일본 싱크로트론 가속기 센터인 SPring-8은 만족할 수준은 아니지만 산타 할아버지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원문은 여기) SPring-8의 2010년 예산은 84억 9천만 엔으로 작년에 비해 겨우(?) 1억7천만 엔이 삭감된 액수입니다. 원래 제시 되었던 삭감 수준이 1/3 에서 1/2 이었으므로 이 정도면 학계의 항의가 먹혔다고 볼 수 있겠네요. (사실 이정도로 예산이 깎이면 연구소 문을 닫아야 할 정도입니다.) 불필요한 연구비를 줄여서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 등을 추진하겠다는 하토야마 정권이 정책을 바꾼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오늘 뉴스에는 일본 유권자의 50%가 민주당 정권을 지지하지만 민주당의 공약에서 지지하지 않는 공약이 바로 고속도로 무료화라고 하네요. (뉴스는 여기)

 

프랑스는 좋은 편입니다. 연구소의 아이비 리그를 만들겠다는 사르코지 대통령의 약속에 따라 대학교에 110억 유로라는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이는 미국의 연구비 증액에 자극받은 프랑스 정부가 약속한 350억 유로의 일부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돈은 지난 10년간 예산 부족에 허덕였던 프랑스 대학들의 잃어버린 10년을 보충하는 데 주로 쓰일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 연구진들의 (불만에 찬) 튀어나온 입은 아직 다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영국은 역시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영국은 STFC(Science and Technology Facilities Council)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데 5년간 24억 파운드를 투자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액수는 원래 예정보다 삭감된 액수로 위원회는 삭감액을 각 분야에 고루 반영하려 노력했다고 말했습니다. 핵물리 쪽에서는 원래 예산의 29%가 깎이고 LHC에서 행해질 ALICE 실험 연구가 취소되었습니다. 물론 ALICE 실험은 계속됩니다. 단지 영국 쪽의 연구 기여가 빠진다는 이야기 입니다.

 

제일 사정이 좋은 곳은 그래도 미국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연구 개발비를 점진적으로 GDP의 3% 수준으로 올린다는 목표를 제시했었는데 이에 따라 예산이 대부분 올랐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 가장 큰 삭감은 표준연구소 NIST의 연구 시설 건설 부문으로 14.5% 삭감되었습니다. (NIST 전체로는 예산이 증액되었습니다.) 가장 크게 예산이 오른 부문은 국가 핵 안전 분야의 핵 비확산 파트로 44% 예산 증액이 되었고 학술 연구 쪽으로 중요한 NSF는 8.4% 증가했습니다. 에너지성(DOE)의 과학국(Office of Science)의 전체 예산도 3.1% 증액되었는데 그 중 핵물리는 4.5%, 입자물리는 1.9% 증액되었습니다.

 

 

<CERN LHC의 ALICE 검출기를 조립하는 장면>




2010년 1월 1일 금요일

볼펜의 역사

 

위키에서 우연히 볼펜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볼펜이라고 생각되는데 볼펜의 종류는 요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우리 생활을 편하게 해주는 많은 발명이 긴 산고 끝에 나온 것처럼 볼펜도 많은 발명가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위키에 나온 정보를 여기 소개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펜, 중국어로는 原子筆 , 영어로는 ball-point pen 또는 ball pen이라고 배웠는데 영국과 호주에서는 biro (바이로우 또는 비어로, 비로)를 쓰기도 한답니다. 볼펜의 심은 보통 0.7 mm 에서 1.2 mm의 구슬로 볼펜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 된듯합니다. 그럼 비로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유래 했을까요? 그건 바로 볼펜을 발명한 헝가리의 발명가 리슬로 비로 (László Bíró)에서 나왔습니다.

 

볼펜이 나오기 전까지 서양의 주 필기도구는 펜과 만년필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만년필을 더 좋아합니다만.) 하지만 이것들은 쓰기에 그리 편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종이가 아닌 다른 표면에 글을 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볼펜은 겉으로는 간단해 보이지만 쓰기에 안정적이고 대량 생산이 가능한 볼펜을 경제적인 가격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실험과 더불어 현대 화학과 20 세시의 기술이 접목되어 있습니다.

 

볼펜에 관한 기록은 17 세기 갈릴레오 갈릴레이까지 올라간다고 합니다. 볼펜에 대한 첫 특허는 1888년 10월 30일 Kayleigh frost Loud라는 가죽을 다루는 사람에 의해서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가죽을 무두질하는 사람인데 무두질을 위해 가죽에 표시를 해야 하지만 당시의 만년필로는 가죽에 표시를 하는 게 불가능 했습니다. 이 사람의 아이디어는 소켓에 회전할 수 있는 작은 금속구를 넣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볼펜의 구조와 같은 거죠. 이렇게 만든 첫 볼펜은 발명가의 의도대로 가죽과 같은 거친 표면에 글을 쓸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종이위에 세밀하게 글을 쓰기에는 볼펜이 너무 거칠었기 때문에 상용화 되지는 못했습니다.

 

1904년부터 1946년 사이에 만년필을 대체할 수 있는 필기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습니다. 이 때 여러 건의 볼펜에 대한 특허가 발급되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잉크를 가는 관에 넣고 관 끝에 작은 볼을 가두어 빠지지 않도록 하고  잉크가 이 볼에 달라붙어 있다가 종이위에 볼을 굴리면 잉크가 종이에 묻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방식의 단점은 잉크가 고르게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볼 소켓이 너무 타이트하면 잉크가 너무 적게 나오거나 아예 나오지 않았으며 반대로 너무 느슨하면 잉크가 쏟아져 나오곤 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아이디어가 나왔지만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 때 헝가리의 신문 편집자인 라슬로 비로가 등장합니다. 그 또한 글을 많이 쓰는 사람으로 만년필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는데 잉크를 채우고 지저분해진 종이를 치우는데 시간이 많이 들고 만년필의 날카로운 펜끝 때문에 종이가 쉽게 찢어지곤 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볼펜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비로는 그 당시 볼펜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을 알고 있었는데 그는 신문 인쇄 잉크가 빨리 발라서 종이가 젖거나 얼룩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종류의 잉크를 이용해 볼펜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당시 볼펜의 또 다른 문제점은 잉크가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용 시에는 볼펜을 거의 수직으로 잡고 써야 했습니다. 비로는 잉크관에 압력을 가해 삼투압을 이용해 잉크가 흐르게 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화학자인 동생 조오지의 도움으로 현재의 볼펜이 탄생하고 1938년 6월 15일 영국 정부에 특허를 신청하였습니다.


1940년 비로 형제는 친구와 함께 나치 독일을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주합니다. 그곳에서 Birome라는 브랜드로 볼펜을 생산하였습니다. 볼펜은 또 만년필과 달리 높은 곳에서도 사용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영국 공군이 볼펜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1945년 샤프펜슬 메이커인 에버샤프는 에버하드-파버와 함께 볼펜의 미국 판매를 위해 특허를 취득합니다. 같은 시기 한 미국 사업가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비로의 볼펜을 발견하고 몇 자루를 사서 귀국 후 레이놀드 국제 펜 회사를 차리고 특허 없이 볼펜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볼펜은 1945년 10월 29일 뉴욕의 백화점에서 한 자루에 당시 가격으로 $12.50 에 팔렸으니 엄청나게 비싼 제품이었습니다. 그 후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볼펜이 생산되어 팔려갔습니다. 값싼 볼펜심은 BIC, 후버, 제록스 같은 회사에 의해 생산되었습니다. 비로의 생일인 9월 29일은 아르헨티나에서 1990년 발명가의 날로 지정되어 기념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2년 한 회사원이 일본사람들이 볼펜을 쓰는 것을 발견하여 일본의 볼펜 제조 회사를 알아내고 이듬해인 1963년 첫 볼펜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회사원이 바로 (주)모나미를 설립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당시 가격은 15원이었다고 합니다.)


 

<볼펜 설계도와 발명가 라슬로 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