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30일 토요일

미국 최초의 흑인 물리학박사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 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등번호 42번은 모든 팀에서 영구결번이라고 하죠. 미국 프로 농구 NBA의 첫 흑인 선수는 척 쿠퍼, 냇 클리프턴, 얼 로이드라는 세 선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각 분야에서 인종 차별을 깨뜨린 선구자들 입니다. 그러면 물리학에서는 어떨까요? 아쉽게도 지금 현재에도 흑인 물리학자들을 많이 볼 수는 없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물리학이 스포츠처럼 매력있지도 않고 그리고 부를 안겨주지 못하니까 관심도 덜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세계에서도 남녀 차별과 인종 차별은 존재해 왔습니다. 다만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때가 1947년 4월,  미국 프로 농구의 인종 장벽이 깨진 것은 1950-1951 시즌이라고 하는데 물리학에서 최초의 흑인 박사가 탄생한 것은 그보다 70여년 빠른 1876년 6월이라고 하니 조금은 체면이 설 지 모르겠습니다만. 미국 물리학회의 기록으로는 미국 최초의 흑인 물리학 박사는 1852년 코네티컷의 뉴 하븐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알렉산더 부쉐 (Edward Alexander Bouchet; 1952-1918)입니다. 24살에 학위를 받았습니다. 사진 속의 인물이 젋은 시절의 부쉐입니다.

 

 

그는 미국 대학교에서 배출된 첫번째 흑인 물리학 박사이면서 미국 대학교가 배출한 6번째 물리학 박사입니다. 그는 또 예일 대학교 최초의 흑인 졸업생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사우스 케롤라이나에서 주인을 따라 코네티컷으로 이주한 노예였습니다. 나중에 주인은 그를 사업자금을 주면서 노예에서 해방합니다. 그 후 그는 흑인 교회의 집사로 뉴 하븐의 흑인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됩니다. (그 교회는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로 탈출한 노예들이 중간에 들르는 곳이었습니다.) 에드워드에게는 세 누나가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아이들에 대한 교육에 적극적이었고 에드워드는 당시 관습에 따라 지역 흑인 공립학교인 Artisan Street Colored School에서 공부를 합니다. 총 학생수는 30명 이었고 교사는 한 명 뿐인 유색인종만 다니는 학교입니다. 1866년부터 1868년까지 뉴 하븐 고등학교를 다니고 1868년 (16세) 그는 놀랍게도 졸업생을 예일 대학교로 많이 보내기로 유명한 사립 대학예비학교인 Hopkins Grammar School에 입학합니다. 그곳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기하학, 대수학, 역사와 같은 전통적인 교육을 받고 1870년 (18세)에 반에서 1등으로 그 학교를 졸업합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당당히 예일 대학교에 입학합니다. 아버지의 주인이었던 로빈슨의 아들과 함께 말입니다. 1874년 (22세)에 반에서 124명중 6등의 성적으로 흑인으로서는 예일 대학교 (최초의 입학생은 아니지만) 최초의 졸업생이 됩니다. 그는 또 아주 우수한 학생만 가입할 수 있는 Phi Beta Kappa에 처음으로 추천된 흑인입니다. (이 때 가입은 하지 못했고 최초의 Phi Beta Kappa의 흑인 멤버는 1877년 버몬트 대학의 헨더슨입니다.) 그의 이력은 필라델피아의 자선 사업가이며 Institute for Colored Youth의 운영위원인 알프레드 코우프(Alfred Cope)의 관심을 끌게 됩니다. 그의 후원으로 에드워드는 학업을 계속해서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그 의 주 지도 교수는 아더 라이트로 그는 1861년 미국 대학교에서 최초로 물리학 박사를 받은 사람이었고 에드워드의 주 연구과제는 기하 광학으로 그의 학위 논문 제목은 “On Measuring Refractive Indices” (굴절률 측정에 대해) 이었습니다. 학부를 마친 후 불과 2년 만에 이룬 업적입니다.당시 이 정도의 학력과 업적이라면 누구든 쉽게 대학교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흑인이 아니었다면. 결국 인종 차별의 장벽에 막혀 그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합니다. 1876년 그는 후원자인 코우프의 제의를 따라 필라델피아에 있는 Institute for Colored Youth에서 교편을 잡습니다. ICY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흑인을 위한 고등학교로 퀘이커 교도가 세웠으며 미국에서 흑인으로는 최초로 유명 대학교의 교수가 된 리즌 (Charles L. Reason)이 교장(1852-1856)이었던 곳입니다.

 

에드워드는 ICY에서 26년간 물리와 화학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과 지원 부족으로 스스로의 연구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1900년 경 흑인 교육에 대한 논쟁이 치열해 집니다. 즉 흑인에게 학문적인 교육대신 직업 교육을 시켜야하는지에 관한 논쟁입니다. 결국 ICY는 직업교육을 택하고 펜실베니아의 체니로 옮겨가 체니 대학교 (Cheyney University)가 됩니다. (지금은 학사와 석사학위를 제공하는 학부 중심 대학입니다.) 학문적 교육을 주장한 에드워드는 1902년 학교를 떠나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교육을 계속합니다. 1916년 동맥경화로 완전히 은퇴한 그는 뉴 하븐의 어린시절 자랐던 집으로 어머니에게 돌아옵니다. 그곳에서 그는 1918년 66세를 일기로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세상을 떠납니다. 2 년 후 그의 어머니 또한 102세를 일기로 운명합니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었습니다. 편지나 노트도 전해지지 않아 그에 관해 알려진 게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흑인도 고등 교육을 받고 학문을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첫번째 인물입니다. 두번째로 흑인 물리학 박사가 탄생한것은 그가 사망한 해인 1918년 엘머 이메스에 의해서 입니다. 최초의 흑인 물리학 박사가 탄생한지 42년 후 의 일입니다.

 

<예일 대학교에 있는 그의 초상화>


2009년 5월 28일 목요일

과학을 하는 대학원생에게 하는 충고

대학원에 들어오는 이유는 물론 석,박사 학위를 따기 위한 것입니다. 학위를 따기 위해서는 논문을 써야합니다. 특히 이공계의 경우에는 SCI 급 저널에 논문을 실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석사학위 논문 또는 그 후속 논문이 저널에 실리는 자기 커리어의 첫 번째 논문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기 소개하고자 하는 글은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쉬턴스 교수 (동물학)가 쓴 "대학원 학생들에게 보내는 충고"입니다. 대상은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입니다. 원본은 여기 에 있고 이 포스팅에서는 이 글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 항상 최악에 대비하라.
    대학원 과정에서 부딪히는 큰 문제의 대부분은 조금만 더 선견지명이 있으면 피할 수 있다. 좀 더 시니컬해져라. 연구가 잘 안될 수도 있고 학위 심사위원들이 시큰둥할 수도 있다. 플랜 B를 생각하라.
  • 아무도 너를 위해주지 않는다.
    너를 생각해주는 교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교수도 있다. 너를 생각해주는 교수라도 항상 바쁘다. 따라서 그들이 실제로 너를 위해 쓸 시간이 없다. 너의 인생은 네것이다. 교수는 연구과제에 도움말을 주고 생활비를 대주지만 연구는 네가 하는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가서 말하라. 그게 그들의 의무이고 월급 받는 이유다. 먼저 찾아가라. 그들은 절대로 먼저 와서 도와주지 않는다.
  • 네가 하는 연구의 중요성을 숙지하라.
    첫1년간 많이 읽고 생각하라. 논문이나 책에 나오는 걸 확신을 갖기 전까지는 모두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읽어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좌절마라. 네 잘못이 아니고 설명을 바르게 못한 저자 책임이다. 연구를 하고 있지 않으면 여기 왜 있는지라는 생각이 들것이다. 참을성있게 기다려라. 이 단계는 새 아이디아의 흐름을 아는데 중요하다. 자기 분야의 중요한 문제가 무언지 알라. 이는 연구 프로젝트를 받을 때 네가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판단하는 데 중요하다. 박사학위는 추후 너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 네가 그 연구를 왜하고 있는지 모른다면 데이터 수집하는 등의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마음을 강하게 먹어라.
    대학원에서는 할 일이 많다. 수업도 들어야하고 학부생들을 가르치기도 해야하고 언어도 익혀야하고, 등등. 여기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a. 박사학위 논문이 중요하다는 이미 강조했다. 하지만 완벽한 학위 논문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일이 그렇듯 학위 논문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네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돈, 시간, 에너지, 아이디어 등등, 최선을 다해 학위 논문을 준비해라. 그러기 위해서는 코스 웤을 빨리 끝내라. 연구하면서 많이 배운다.

    b. 주눅들거나 위축되지 마라. 동료 학자로 대접받도록하고 그렇게 행동하라.

    c. 대학원은 네 인생을 설계하는 하나의 문일 뿐이다. 다 좋은 기회가 생기면 대학원을 떠날 준비도 해라. 세상에는 학위 말고도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이 많다. 대학원을 유일한 옵션으로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 일이 안 풀리면 비참함을 느낀다. 재능이 없다고 생각되면 자신을 비하하고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았는 셈이된다. 과학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되면 과감히 다른 일을 시작해라. 물론 동료와 지도교수와 상의하고.
  • 강의를 많이 듣지 마라.

    이미 충분히 기초가 되어 있다면 수강 과목을 줄이고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라. 수동적으로 듣기 보다 능동적으로 사고하라. 시간을 충분히 갖고 다른 사람과 1 대 1 로 접촉하라. 읽고 토의하는게 더 빨리 배우는 방법이다. 동료와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하고 교수를 초대해보라. 싫어하는 교수는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테크닉을 배우는 강좌는 수강해야한다.

  • 연구 계획을 세우고 평가를 부탁하라.

    연구 계획을 새우는 것은 많은 장점이 있다. 먼저 읽고 생각한 것을 정리하고 거기서 무언가를 끄집어내게 한다. 그리고 보다 독립적이 된다. 말로 하면 너무 복잡하고 명확하지 않지만 글로 쓰면 생각이 정리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생산적인 비평을 줄 수 있다. 작문 연습은 많이 하면 할수록 좋다. 계획서에는 간단히 연구 목표를 써라. 그리고 그 일이 과학적으로 중요한 이유를 써라. 그리고 연구 과제를 단계별로 작은 과제로 나누어라. 연구 도중 발생할 문제나 어려운 점을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 그런 일이 발생할때 할 수 있는 일들을 적는다. 2-3개 프로젝트를 동시에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잘못 잡은 연구 방향은 빨리 발견한는 게 좋다. 학위 논문 발표 날짜를 생각하고 거기에 맞추어 연구 계획을 짜라. 준비가 되면 2-3주에 걸쳐 계획서를 작성하고 리뷰를 부탁한다. 혹평을 기대하고 답변을 생각해보라.

  • 지도 교수를 이용하라.

    지도 교수에게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주지시켜라. 방해는 하지 말고. 최소한 1년에 1-2번 진행사항을 글로 써서 제출해라. 성격차이와 같은 개인적 문제는 피하라. 지도 교수와 잘 지낼 수 없다면 지도 교수를 빨리 바꿔라.

  • 학위논문의 형태
    가장 기본에서 출발해 검증 되지 않았던 가정을 테스트하라. 또는 새로운 연구 동향의 기본 문제를 생각하라.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많은 데이터를 모으는 것도 괞찮은 일 중 하나다.
  • 논문 쓰고 출판하기를 빨리 시작해라.
    논문 쓰지 않고는 이 바닥에서 살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연구도 출판되지 않으면 완성된 것이 아니다. 글을 깨끗이, 간결하고 잘 정돈되게 쓰도록 연습해라. 경험 많은 이와 함께 공동 논문을 쓰는 것도 도움이 된다. 첫번째 논문이 세상을 놀라게 할 논문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보통의 저널에서 출발해 최고의 저널에 논문을 출판하도록해라. 학위 논문을 위한 연구를 나누어 단계별로 논문으로 출판하라. 과학 논문 쓰는 방법에 대한 책을 3-4년간 일년에 한번쯤은 계속 읽어라. 논문을 완성하면 저널에 보내기 전에 다른 이에게 리뷰를 부탁해라.
  • 꾸준히 논문을 써라. 하지만 너무 많지 않게.
    쉽게 잊혀지는 논문 수십개 보다 중요한 논문을 몇 편 쓰는 게 더 중요하고 도움이 된다. 대부분의 논문을 인용이 잘 되지 않는다. 약 10%의 논문이 90%의 인용을 차지한다. 양보다 질이 더 중요하다. 일년에 한 두 편의 좋은 논문을 유명 저널에 출판하면 잘 하고 있는 것이다.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Omega_b 의 발견


\Omega_b는 하나의 b 쿼크와 두개의 s 쿼크를 갖는 바리온이다. 이 \Omega_b 입자를 찾기 위한 실험결과가 미국 Fermi Lab의 CDF Collaboration에서 발표되었는데 (arXiv:0905.3123) \Omega_b의 질량이 6054 MeV로 측정되었다. (더불어 \Xi_b의 질량은 5790.9 MeV로 기존의 결과와 일치한다.) 하지만 이 결과는 일 년전 피지컬 리뷰 레터에 발표된 D0 Collaboration의 결과와는 다르다. D0는 \Omega_b의 질량이 6165 MeV라고 발표했다. 두 그룹의 결과가 약 110 MeV 나 차이가 난다. 두 그룹은 모두 Fermi Lab에서 실험했지만 결과는 다르다. 물론 둘은 서로 자기가 맞다고 싸우고 있다. (여기를 클릭) Lattice 이론은 CDF에 더 가깝지만 어떻게 결론지어질지.


<왼쪽은 D0 데이터, 오른쪽은 CDF 데이터>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9년 5월 21일 목요일

네팔 (We want to study physics)


2006년 12월 네팔에서 벌어졌던 데모입니다. 데모가 벌어진 장소는 네팔 교육체육부 앞 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물리공부를 더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고국을 떠나기 위해서는 학위를 받아 유학가는게 일반적인데 그중에서도 외국에서 전공을 (돈을 벌 수 있는) 공학으로 바꾸기 쉬운 물리학 학위를 갖는 게 유리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강좌 수가 제한되어 있어 대학에서 물리를 수강하는게 힘들고 그래서 물리 강좌 수를 늘려 달라는 데모를 한 것 이라고 합니다.




2009년 5월 19일 화요일

오스트리아, CERN 탈퇴를 철회하다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경제 위기의 영향이 드디어 유럽 과학계까지 뒤흔들었다. 이번 달 초 (2009년 5월), 오스트리아의 과학부 장관은 오스트리아가 2011년 이전까지 CERN에서 탈퇴한다고 발표해서 많은이들을 놀람과 충격에 빠뜨렸다. 이는 현재 거대 강입자 가속기 (LHC)의 가동으로 들떠있던 CERN의 과학자들을 낙담케 했는데 그 이유는 비록 오스트리아가 CERN에 투자하는 금액이 약 2000만 유로로 CERN 전체 예산의 2.2% 정도이기 때문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다른 참여국들을 자극 해 탈퇴선언이 잇따르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는 1959년부터 CERN의 창립과 운영을 지원해왔는데 최근의 경제난으로 더 이상 CERN의 회원국이 될 수 없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세계 각지의 많은 과학자들의 탄원을 불러 왔고 특히 오스트리아 학자들은 이 사건이 국제 사회와 과학계에서 오스트리아의 신뢰를 추락시키고 결국은 오스트리아의 과학을 후퇴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CERN을 탈퇴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의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다행히 오스트리아 수상은 오늘 오스트리아가 CERN의 회원국 자격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발표해 이번 사건은 수습과정으로 들어 갔다.



2009년 5월 13일 수요일

핵융합: 고온 혹은 상온


근래 핵융합에 관한 두가지 사건이 보도된 바 있다. 하나는 우리나라의 핵융합 실험장치인 KSTAR의 준공이고 다른 하나는 상온핵융합의 가능성에 대한 기사로 재미 한국계 기업인이 원천기술(?)을 확보 했다는 기사다. 핵융합의 평화적 이용은 지난 반세기동안 많은 과학 기술자의 꿈이었다. 우리는 현재 얼마나 이 꿈에 가까이 와 있을까?


고온 핵융합

핵융합의 대표가 고온 핵융합이다. 두 가지의 핵이 융합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온이 필요하다. 핵융합을 이용해 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고온을 다스려야 하고 이는 고온 핵융합의 아용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다. 최근 KSTAR와 ITER가 고온 핵융합의 새로운 장래를 개척하는 첫걸음을 시작했고 많은 이들이 상당한 기대를 하고 있는듯 하다. (핵융합에 대한 국내의 연구는 http://www.kps.or.kr/~pht/7-6/02.html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핵 융합을 통해 과학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나마 높아지는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며 KSTAR의 설계에서 완공까지 묵묵히 연구를 수행한 연구진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렇지만 여기서 한 가지 우려가 되는 점이 있다. 많은 언론매체들은 마치 핵융합을 이용한 인공태양이 10-15년후면 가능하다는 장밋빛 미래를 보도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듯하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기억해야할 점은 거의 모든 학술 프로젝트가 그렇듯이 ITER 또한 시간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몇 달 전  미국 의회와 정부가 ITER에 관련된 프로젝트를 2009년에 "다시"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ITER의 회원국중 많은 지분을 갖고 또 많은 연구비를 지원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다시" 지원을 하기로 했다면 그 동안에는 지원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미국은 작년인 2008년 ITER에 관계되어 신청된 연구비 1억6천만 달러를 거의 완전 삭감하여 약 1천만 달러만 지원했다. 즉 거의 0이 된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학회에서 과학자들에게 자기 지역구의 연방의원에게 편지를 쓰도록 권하기도 했지만 결국 결론을 바꾸지 못했다. 더구나 미국이 ITER 연구비를 삭감한 게 작년이 처음은 아니다. 다행히 올해에는 ITER에 연구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면 미국은 왜 ITER 연구비를 삭감했을까? 인공태양의 기술을 자국이 독점하기위해 국제 공동 연구를 원하지 않아서일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그게 목적이라면 ITER에 지원하기로 한 연구비 정도가 미국내의 다른 핵융합 프로젝트로 들어가야 하지만 미국내에 그렇게 큰 프로젝트는 없다. 핵융합은 성공하기만 하면 인류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따라서 몇 억, 몇 십억달러의 투자비는 성공시의 보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미국 정부가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성공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핵 융합은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험적으로 증명된 아주 잘 확립된 연구 분야다. 핵융합을 이용한 수소폭탄의 성공이후 핵융합 학계는 핵융합의 평화적 이용이 20-30년내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30년 이상이 지난 지금 ITER의 목표는 상용화된 핵융합 발전소를 20-30년내에 완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항상 30년'이 미국정부를 비롯한 회의론자들을 만들어 내는데 일정 역할을 해온 셈이다. 사람들의 기대를 부추기는 현재의 언론 보도로 보건대 보면 만일 ITER와 KSTAR가 공언한 시간표대로 핵융합발전을 진행시키지 못할 경우 그 후폭풍이 심히 우려된다. 핵융합에 대한 연구와 지원은 꾸준히 계속 되는게 바람직하다. 하지만 장미빛 전망만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이 프로젝트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같이 알려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상온 핵융합을 연구하는 학자들. 왼쪽부터 Randall J. Hekman (Hekman Industries, LLC, Grand Rapids, MI), Michael C. H. McKubre (SRI International, Menlo Park, CA), Peter L. Hagelstein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Cambridge, MA), David J. Nagel (The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Washington DC) and Graham Hubler, (Naval Research Laboratory, Washington, DC) 출처: http://newenergytimes.com/v2/government/DOE/DOE.shtml]




상온 핵융합

1989 년 폰스와 플라이쉬만의 상온 핵융합에 대한 발표는 전세계를 뒤흔들었고 수 많은 학자들이 곧장 연구에 착수했다. 한때는 그들이 사용한 팔라듐을 생산하는 세계에서 몇 안되는 회사를 MIT에서 싹쓸이 하여 향후 2-3년간의 생산량을 모두 입도선매했다는 루머(혹은 사실?)도 떠 돌았을 정도로 그 파급 효과는 엄청났다. 하지만 그 실험을 재현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미국물리학회는 상온 핵융합을 실패로 규정했다. 그 후 상온 핵융합은 그동안 사이비 과학의 대명사로 오명을 떨쳐왔고 주류 물리학계는 이 연구에서 손을 뗀다. (노벨상 수상자인 쉬빙거는 상온핵융합을 지지했으나 그의 논문도 주류 저널에서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물론 상온 핵융합을 그후에도 계속 연구하는 이들이 있었고 오명을 떨치기위해 상온핵융합(cold fusion)이라는 말대신 저에너지 핵반응 (Low Energy Nuclear Reaction, LENR)이나 응집물질 핵과학 (Condensed Matter Nuclear Science)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주류에서 소외되었음에도, 성공시의 커다란 대가 때문에, 이 연구를 지원한 곳은 많았다. 1990년부터 1998년까지 일본의 도요타 자동차는 폰스와 플라이쉬만에게 1천2백만 파운드를 투자했고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일본의 경제산업성은 2천만 달러를 그리고 인도 정부도 상당액을 투자했으나 결국은 모두 손을 털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새로운 후원자가 나타나 최근의 실험 결과 발표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직도 그 진위는 확실히 모른다. 상온 핵융합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폰스와 플라이쉬만의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1989년 폰스와 플라이쉬만 그룹과 동시에 발표하기로 해놓고 뒤통수를 맞은 브리검 영 대학교의 존스(Jones)의 뮤온을 이용한 방법이다. (존스는 후에 911 음모론을 주장한 사람으로 유투브의 동영상에 자주 나온 사람이다.)  뮤온을 이용한 방법은 팔라듐을 이용한 것과 달리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험적으로 설명이 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연구한 사람으로는 구소련의 유명한 물리학자 사하로프부터 잴도비치, 알바레즈 등의 유명한 학자들이 있으며 전자기학 교과서로 유명한 잭슨 (J.D. Jackson)이 이 분야의 중요한 논문을 썼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잭슨의 논문은 이 방법은 연쇄반응이 되지않아 경제성이 없다고 결론내린다. 어쨌든 상온핵융합은 고온핵융합보다 갈길이 더 멀다. 상온 핵융합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모토는 "차 한잔 끓여줘."이다. 차 한잔 끓일 정도의 열이나 만들수 있느냐는 비아냥이다.  (그림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