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프로야구 메이저 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등번호 42번은 모든 팀에서 영구결번이라고 하죠. 미국 프로 농구 NBA의 첫 흑인 선수는 척 쿠퍼, 냇 클리프턴, 얼 로이드라는 세 선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각 분야에서 인종 차별을 깨뜨린 선구자들 입니다. 그러면 물리학에서는 어떨까요? 아쉽게도 지금 현재에도 흑인 물리학자들을 많이 볼 수는 없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물리학이 스포츠처럼 매력있지도 않고 그리고 부를 안겨주지 못하니까 관심도 덜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세계에서도 남녀 차별과 인종 차별은 존재해 왔습니다. 다만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때가 1947년 4월, 미국 프로 농구의 인종 장벽이 깨진 것은 1950-1951 시즌이라고 하는데 물리학에서 최초의 흑인 박사가 탄생한 것은 그보다 70여년 빠른 1876년 6월이라고 하니 조금은 체면이 설 지 모르겠습니다만. 미국 물리학회의 기록으로는 미국 최초의 흑인 물리학 박사는 1852년 코네티컷의 뉴 하븐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알렉산더 부쉐 (Edward Alexander Bouchet; 1952-1918)입니다. 24살에 학위를 받았습니다. 사진 속의 인물이 젋은 시절의 부쉐입니다.
그는 미국 대학교에서 배출된 첫번째 흑인 물리학 박사이면서 미국 대학교가 배출한 6번째 물리학 박사입니다. 그는 또 예일 대학교 최초의 흑인 졸업생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사우스 케롤라이나에서 주인을 따라 코네티컷으로 이주한 노예였습니다. 나중에 주인은 그를 사업자금을 주면서 노예에서 해방합니다. 그 후 그는 흑인 교회의 집사로 뉴 하븐의 흑인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됩니다. (그 교회는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로 탈출한 노예들이 중간에 들르는 곳이었습니다.) 에드워드에게는 세 누나가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아이들에 대한 교육에 적극적이었고 에드워드는 당시 관습에 따라 지역 흑인 공립학교인 Artisan Street Colored School에서 공부를 합니다. 총 학생수는 30명 이었고 교사는 한 명 뿐인 유색인종만 다니는 학교입니다. 1866년부터 1868년까지 뉴 하븐 고등학교를 다니고 1868년 (16세) 그는 놀랍게도 졸업생을 예일 대학교로 많이 보내기로 유명한 사립 대학예비학교인 Hopkins Grammar School에 입학합니다. 그곳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기하학, 대수학, 역사와 같은 전통적인 교육을 받고 1870년 (18세)에 반에서 1등으로 그 학교를 졸업합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당당히 예일 대학교에 입학합니다. 아버지의 주인이었던 로빈슨의 아들과 함께 말입니다. 1874년 (22세)에 반에서 124명중 6등의 성적으로 흑인으로서는 예일 대학교 (최초의 입학생은 아니지만) 최초의 졸업생이 됩니다. 그는 또 아주 우수한 학생만 가입할 수 있는 Phi Beta Kappa에 처음으로 추천된 흑인입니다. (이 때 가입은 하지 못했고 최초의 Phi Beta Kappa의 흑인 멤버는 1877년 버몬트 대학의 헨더슨입니다.) 그의 이력은 필라델피아의 자선 사업가이며 Institute for Colored Youth의 운영위원인 알프레드 코우프(Alfred Cope)의 관심을 끌게 됩니다. 그의 후원으로 에드워드는 학업을 계속해서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그 의 주 지도 교수는 아더 라이트로 그는 1861년 미국 대학교에서 최초로 물리학 박사를 받은 사람이었고 에드워드의 주 연구과제는 기하 광학으로 그의 학위 논문 제목은 “On Measuring Refractive Indices” (굴절률 측정에 대해) 이었습니다. 학부를 마친 후 불과 2년 만에 이룬 업적입니다.당시 이 정도의 학력과 업적이라면 누구든 쉽게 대학교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흑인이 아니었다면. 결국 인종 차별의 장벽에 막혀 그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합니다. 1876년 그는 후원자인 코우프의 제의를 따라 필라델피아에 있는 Institute for Colored Youth에서 교편을 잡습니다. ICY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흑인을 위한 고등학교로 퀘이커 교도가 세웠으며 미국에서 흑인으로는 최초로 유명 대학교의 교수가 된 리즌 (Charles L. Reason)이 교장(1852-1856)이었던 곳입니다.
에드워드는 ICY에서 26년간 물리와 화학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과 지원 부족으로 스스로의 연구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1900년 경 흑인 교육에 대한 논쟁이 치열해 집니다. 즉 흑인에게 학문적인 교육대신 직업 교육을 시켜야하는지에 관한 논쟁입니다. 결국 ICY는 직업교육을 택하고 펜실베니아의 체니로 옮겨가 체니 대학교 (Cheyney University)가 됩니다. (지금은 학사와 석사학위를 제공하는 학부 중심 대학입니다.) 학문적 교육을 주장한 에드워드는 1902년 학교를 떠나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교육을 계속합니다. 1916년 동맥경화로 완전히 은퇴한 그는 뉴 하븐의 어린시절 자랐던 집으로 어머니에게 돌아옵니다. 그곳에서 그는 1918년 66세를 일기로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세상을 떠납니다. 2 년 후 그의 어머니 또한 102세를 일기로 운명합니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었습니다. 편지나 노트도 전해지지 않아 그에 관해 알려진 게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흑인도 고등 교육을 받고 학문을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첫번째 인물입니다. 두번째로 흑인 물리학 박사가 탄생한것은 그가 사망한 해인 1918년 엘머 이메스에 의해서 입니다. 최초의 흑인 물리학 박사가 탄생한지 42년 후 의 일입니다.
<예일 대학교에 있는 그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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