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을 레프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 레프리 요청을 받았을 때는 괜히 우쭐해지곤 했는데, 모든 일이 그러하듯, 레프리도 자주 하다 보면 좀 시들해지거나 귀찮아진다. 논문의 레프리를 선정할 때 그 분야의 전문가를 고르지만 아무래도 내가 직접 했던 일이 아니면 참고문헌도 뒤져보고 공부를 좀 해야 한다. 물론 이는 레프리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고 레프리를 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과거에는 레프리가 제출된 논문을 가로채기도 했다는 전설도 있지만 요즘에는 논문을 무조건 arXiv.org에 먼저 올리기 때문에 originality를 훔치는 건 불가능하다. 참고 문헌을 뒤지는 또 다른 이유는 표절이다. 물론 표절된 논문을 참고문헌으로 적지는 않겠지만 참고문헌의 참고문헌을 찾으면 표절여부를 알 수 있다. 레프리하면서 또 점검하는 것은 저자(들)의 과거 논문이다. 이는 자기 표절을 찾기 위해서다. 그리고 논문의 질을 평가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새로운 방법으로 계산을 해서 논문을 쓰고 유사한 계산을 다른 대상에 적용하여 논문을 쓰는 경우 그 결과가 중요하다면 출판 가치가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단지 논문 수를 늘리기 위한 일이 된다. 이 경우 저널의 급을 생각해 출판을 추천하기도하고 리젝트하기도 한다. 며칠 전 유럽의 한 저널에 투고된 논문을 레프리 하였다. 논문의 저자는 혼자였고 (이름을 A라 하겠다.) 논문의 주제는 일견 괜찮아 보였으나 어딘지 엉성하였다. SLAC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보니 역시나 논문 편수가 2-3개 밖에 안 되는 초보였다. 논문을 자세히 읽어본 후 이런 문제점을 발견했다.
<논문심사를 잘하면 이런 상도 받는다고 합니다. 이미지출처 : physics.fau.edu>
(1) 서론이 너무 엉성했다. 서론에는 이 일이 갖는 중요성, 다른 사람이 했던 일, 앞으로 본문에서 다룰 내용의 간단한 소개 등이 들어가야 한다. 페이지 수에 제한을 받지 않는 정규 논문의 경우 서론은 가능하면 자세히 쓰는 것도 좋다. 이 분야에서 중요한 문제와 현재까지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이 이 문제를 접근했는가 그리고 가능하면 각 방법의 중요한 포인트와 결론을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레터 형식의 논문은 이 내용을 줄이고 짧게 요약할 수 있으나 본질은 같다. 잘 쓰인 서론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리고 인용되기도 쉽다. 하지만 A의 논문은 서론이 아주 짧았지만 양보다도 질이 너무 부실했다. 예를 들어, 이전의 일을 설명하지 않고 단지 "이 문제는 많은 관심을 끌었다.[1-10]" 이런 식이었다. 물론 이는 개인의 성향일 수도 있지만 이런 식의 서론은 적절치 않다.
(2) 본문에서 필요 없는 수식을 나열하였고 수식을 대부분 이전에 자신이 출판한 논문에서 가지고 왔다. 예를 들면 a,b,c라는 변수의 값을 정하기 위해 식 20여개를 사용했다. (따라서 를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변수를 결정한다.) 하지만 논문에는 30여개의 수식이 나열되었다. 이는 이전의 논문에서 가져온 것이다. (물론 각 식이 완전히 같지는 않고 조금씩 다르다.) 변수 결정에 쓰이지 않은 수식을 나열한 것은 저자가 자신의 논문에 주의를 충분히 기울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족을 달면 연속되는 많은 수식을 본문에 쓰는 것은 논문의 논점을 흐리게 하기 쉽다. 차라리 그런 복잡한 수식은 본문의 토의에서 꼭 필요하지 않으면 논문 뒤의 아펜딕스로 옮기는 게 더 보기 좋다.
(3) 결론이 명확하지 않았다. 이 논문의 계산 결과를 표와 그림으로 주었으나 이 결과물들이 주는 결론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A는 같은 계산을 다른 모형을 써서 계산하여 이전에 출판하였다. 지금의 논문 결과는 이전과 좀 다르다. 다른 모형을 썼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어떤 무엇이 두 모형의 결과를 다르게 하는지 어느 결론이 더 신뢰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등을 전혀 토의하지 않았다. 논문은 레포트가 아니다.
이런 문제점은 논문을 쓴 후 다른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 리뷰를 부탁하면 쉽게 지적해 줄 수 있는 것들이다. 논문은 다른 사람에게 읽혀지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출판전에 가까운 사람에게 보이고 평가를 부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A의 논문에서는 그 외에도 전문적으로 세세한 분야에서 오류가 보였다. 미안하지만 에디터에게 보내는 A의 논문에 대한 내 추천은 '리젝트'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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